이야기로 만나는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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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주명 (wnaud0129@hanmail.net) 추천: 203, 조회: 13609, 줄수: 21, 분류: Etc.
시조고려태사장절공(始祖高麗太師壯絶公) 표충재(表忠齋)를 찾아서
충(忠)과 인간미(人間美) 리더십
- 시조고려태사장절공(始祖高麗太師壯絶公) 표충재(表忠齋)를 찾아서

김주명편집위원

한편의 드라마가 역사교과서 보다 낫다? 조금은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드라마에서 보면 왕건 옆에는 익숙하지 않은 ‘능산(能山)’이라는 이름의 사람을 줄곧 볼 수 있었다. 그가 후일 신숭겸장군이며 바로 이곳 지묘동에서 순절로써 ‘충(忠)’을 완성하신 분이시다. 다원화 된 현대사회에서, 전통적 가치관이 점점 이야기로만 들려지는 21세기 사회에서 신숭겸장군이 이룩한 ‘충(忠)’은 우리와 또 어떻게 소통되는지 대구시 동구 지묘동에 있는 표충재(신숭겸장군유적지,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 1호)를 찾았다.
 역사서의 기록으로 보면 장군의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며, 선대(先代)는 전라도 곡성사람(출생지)으로 알려져 있으며, 광해주(지금의 춘천)사람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단순히 기록만으로 추측해 보면, 전라도에서 강원도로 옮겨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이주의 배경에 어떤 이유가 있다면 이는 장군이 왕건을 도와 견훤과 싸우게 되는 그 무엇이  될 수도 있겠다. 장군은 나면서부터 몸이 장대하였으며 신령한 자질과 기밀한 지략을 갖추었으며 태조 왕건과는 의형제를 맺어 수많은 전쟁에 참가하여 무수한 공을 세우며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다.
어느 날 태조를 따라 평산(平山, 황해도)을 지나갈 때 세 마리 기러기가 높이 날고 있었는데,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이를 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장군이 태조의 명령대로 한발을 쏘아 가운데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추어 떨어뜨리니 태조가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겨 세 마리의 기러기가 지나가던 땅을 하사하였으며 이름을 궁위전(弓位田)하였고 지금의 평산 신씨(平山申氏) 시조가 되었다.     
태조 10년(서기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갑자기 신라 경주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몸소 정예 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출병하였다. 태조 왕건의 군사는 첫 접전을 백안삼거리에서 백제의 측후병과 싸워 승리를 하였다. 그리고 곧장 견훤을 겨냥해 능성동 일대를 지나 영천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미 영천은 견원에 수중에 들어가 더 이상 전진하기가 힘들다고 판단, 은해사 뒷산에 매복하여 돌아오는 견훤을 치기로 하였으나 견훤의 역 매복 작전에 걸려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살내를 사이에 두고 견훤의 군사와 대치하게 되는데, 이때 신숭겸장군과 김락장군이 이끄는 증원병이 합세하였다. 양쪽 진영에서 쏜 화살이 내(川)를 이룰 정도라 하니 지금까지 지명에 남을 정도로 그 전투가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전열을 정비하고 미리사 앞에서 다시 견훤의 군사와 전투를 하였으며 왕건의 군사들은 완전히 포위당하게 된다. 이때 전세가 매우 불리함을 깨달은 장군은 용모가 태조와 비슷한 점을 들어 자신이 태조를 대신하여 죽기를 요청하였고, 태조를 애수(礙藪, 부인사, 동국여지승람에는 미리사)에 숨기고 어거(御車)를 대신타고 김락장군과 더불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한편 왕건은 홀로 피신하여 탈출하였으니 이와 관련해 팔공산과 동구일대에 숱한 지명을 남겼다. 홀로 앉았다는 독좌암, 나중에서야 왕임을 알았다는 실왕리에서 나무꾼에게 얻은 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해안에서 안도하여 반야월을 지나 안심을 거쳐 대덕산으로 와서는 은적사, 안일사 임휴사 등 모두가 왕건과 관계된 지명이다.
 이윽고 태조가 본진으로 돌아와 장군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어서 분별하지 못하는데, 왼쪽 발아래 사마귀무늬가 있는데 불두칠성과 같다는 유금필 장군의 말로 시신을 찾았다. 그리고 목공에게 명하여 머리와 얼굴을 만들게 하고 복장을 갖추게 한 후, 태조가 몸소 제례를 행하였으며 그 자리에는 단을 쌓고 인근에 지묘사를 창건하여 장군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왕건은 장군의 시신을 춘천까지 운구하여 도선국사가 자신을 위해 택한 명당자리를 자신을 위해 순절한 아우에게 내어 주어 극진히 예를 갖추어 무덤을 3개 만들어 장사를 지냈으며 춘천 방동에는 매년 음력 3월3일과 9월9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예종의 도이장가(悼二將歌)를 비롯해 장군의 순절을 애도하는 내용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태조왕건의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있으니 잠시 살펴보겠다. 태조가 팔관회를 베풀어 여러 신하가 함께 서로 기뻐할 때마다, 전사한 공신들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신하에게 명하여 신숭겸장군과 김락장군의 형상을 만들게 하고 조복을 입혀 자리에 앉게 하고는 그 즐거움을 함께 하였고 술과 음식을 내리면 술이 금방 닳아 마르고 장군의 형상이 일어나서 생시와 같이 춤을 추었다. 이로부터 잔치 때 마다 장군의 자리를 배치하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갑식(申甲湜)도유사님 통해 다시 한 번 짚어보자.   
“충과 효, 전통예절이 바닥인 현실에서 장군의 충의 의미를 되새기는 건 너무나 당연하죠. 충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길에 최선을 다하는 것, 더 나아가 직책의 개념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공인으로서, 가장으로서, 사회인으로서 개념을 잘못알고 무시하면, 결국 사람이 불행하게 되죠. 그리고 이렇게 자기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지도자, 신숭겸장군을 충의 길로 이끌어준 태조 왕건이야 말로, 사람의 가슴 아픈 점을 헤아리며 인연의 소중함을 알고 또 사람을 따뜻한 사람으로 대하는 정말 인간미(人間美) 있는 리더쉽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배우면서, 역사적 사실(史實)을 대하면서 문자와 유적으로만 알려하고 사람과 정(情)이 빠졌다는 어리석음이 번득 지나간다. 논어(論語)에서는 ‘진기지위충(盡己之渭忠, 자기에 최선을 다하다)이라 한다. 비로소 신숭겸장군의 충(忠)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죽음으로써 삶을 이룬 장군의 넋이여!
살육의 전장에서 아름다움 꽃 피워
그 향기 천년을 지나 다음 천년 이어지소서!
다음: 신대구십경 2011/08/05(18:46) from 111.65.17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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