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만나는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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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주명 (wnaud0129@hanmail.net) 추천: 242, 조회: 4024, 줄수: 120, 분류: Etc.
신대구십경
신 대구 십경                
- 大邱史 열 장면-

아름다운 경치, 황홀한 장관, 자연의 오묘하고 위대함 등 자연경관을 묘사하는 수많은 말들이 있다.  필자는 현장에서 대구의 문화유산해설을 하면서 세계 여러 도시를 다녀 온 이들에게서 그들의 여행담을 자주 듣는데, 그 중 제일로 곱는 표현이 한국은, 더 나아가 대구는 볼게 없다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경치, 멋있는 장관은 도대체 어떤 것을 가르치는 말일까?

멋있는 볼거리를 음식의 맛에 비유하면 어떨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배부르면 그만이요, 자꾸 먹으면 질리기 십상이다. 또 그 맛 자체를 모르다면 맛있는지는 당연히 모를 것이며, 단지 활동을 위한 칼로리 섭취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황홀한 경치는? 그 황홀함을 보기위해 우리는 적당히 배도 고파야 하며, 그 배고픔이 어떤 것이지도 느껴야 할 것이기에, 대구의 역사를 시대 순으로 10개의 장면으로 재구성 해 그 느낌을 대신하면 어떨까?

1. 달구벌의 주인공들

달구벌의 그 많던 주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무심한 고인돌과 큰 무덤들은 알 듯 한데
고인돌은 이리로 저리로 채이고
큰 무덤들은 비와 바람으로 세월로 깎여 나갔지만
그래도 박물관 한 쪽 자리 잡은 주인들은
모진 세월 피해 한껏 호사 다 누리네!


최근 대구에서도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대구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지는 꽤 오래 된 것으로 보인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이어 지면서 숱한 문화유산을 남겼으나, 도시화와 개발로 인해 지금은 고고학 책이나 박물관에서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래도 고인돌을 비롯해서 선돌, 외곽지의 거대고분군들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고대 대구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2. 하늘아래 제천단에 비옵니다

 여기가 하늘과 제일 가까운 팔공산 제천단
 중악대왕이 지키시는 신령스러운 이 땅으로
 구름처럼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하니
 악신(岳神)의 땅에 이재(異才)의 공덕이 높구나!    
 
대구의 독자적 세력집단들이 신라에 통합 되면서 신라는 오악사상을 바탕으로 팔공산을 중악으로 숭배하며 정상에 제천단을 쌓아 산위의 신인 천신께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통일 후 신문왕 때에는 대구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으나 경주귀족세력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점을 보더라도 대구는 정치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장소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대구로 들어와 정착하였으며 비교적 안정된 사회였다는 것이 대구지역 호족인 이재(異才)를 기리기 위해 최치원이 작성한 “신라수창군호 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통해 알 수 있다.

3. 불국토를 염원하며

 통일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으리라
 백성들은 떠돌고, 굶주림에 아우성치는데,
 골육(骨肉)의 형제들과 또 다시 칼을 드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불법에 귀의합니다.

 통일 신라 후기로 접어들면서 신라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는데, 장보고,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도 대구가 주요한 전투지가 되었다. 또 왕족으로 출가한 심지는 팔공산일원에 많은 사찰을 세웠으며, 그 중 동화사에 민애왕추모탑을 건립한 것으로 보아, 대구는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는 또 다른 중요한 장소였으며, 불교를 일반 대중에게 널리 전파하는 불국토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동수대전 - 패배한 전투, 승리한 전쟁  

 왕건이 겨우 살아 빠져나간 골짜기 그 자락에
 출사를 거부한 고려귀족 눈물 삭여 자리 잡고
 조선에서도 한 참을 지나 표충사 세우고 제 올리니
 천년이나 이어지는 역사의 함수에서
 시간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상수(常數)이고 싶어라!

팔공산 자락 자락에는 대구와 특별히 연관성이 없는 성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체로 이주해 온 시기를 추정하면 조선 개국 이 후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기존 사회지도층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오늘날에도 팔공산과 대구 앞산일대에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어쩌면 이들 귀족들의 남다른 노력 때문은 아닐까?




5. 세상을 비껴서는 삶

 산은 사람의 뜻을 안아 품어 주고
 칠백 리 낙동강은 감아 돌아 살리니
 성인(聖人)의 덕목이
 후기신이신선(後其身而身先)*하고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 이란 것을
 육백년 세월이 다시금 일러 주네!

달성군 하빈 묘골에는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육신사(六臣祠)가 있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박팽년의의 둘째 아들인 박순의 아내 친정이 대구 하빈이였고, 그래서 대구로 와서 관비로 있던 중 유복자를 낳게 되었다.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몰수하라”는 어명을 피해 종의 딸과 서로 바꾸어 키우니 박씨 성을 가진 노비라는 뜻으로 “박비”라 불렀다. 그 후 이모부인 이극균이 경상도 괄찰사로 와서 묘골에서 박비를 만나 신분을 드러낼 것을 권하였고, 성종은 찾아온 박비를 용서하고 이름을 박일산(朴壹珊)이라 고치고 사복시정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 박비는 묘골에 터전을 잡아 종가와 태고정 등을 지어 살았으며 그 후손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노자 도덕경 7장 “是以聖人 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에 나오는 구절이며, 성인의 덕목은 그 자신을 뒤로할 때 오히려 앞서게 되고, 그 몸을 밖으로 둘 때 오히려 보존된다. 이는 그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요 그래서 능히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


6. 도를 동쪽으로 옮기다

 가끔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묻습니다.
 도(道)가 무엇입니까?
 대답해 줍니다. 경상도 억양으로
 How to live?(어떻게 살 것인가?)
 어찌 도가 서(西)에만 있어 동(東)으로 옮기기만 할까?

도동서원은 조선 오현(五賢) 중 한 분이신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서 건립한 서원으로 1568년 유림에서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사우(祀宇)를 지어 향사를 지내오다가 1573년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사액되었으나 1597년 왜란(倭亂)으로 전소되었다. 그 후 1605년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재건하고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불리다가 1607년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1871년) 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주요서원 중의 하나이다.


7. 임진왜란의 빛나는 두 조연

 임진년 민중의 고통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바다 건너 침략해 온 왜군인가?
 조선을 구하러 온 명군인가?
 구해주러 올려치면 제 먹을 쌀이나 가져오지
 그래도 두 장군을 받아준 대구 인심
 대명동(大明洞)이 되고 우록동(牛鹿洞)으로 남아있네!

임진왜란은 대구에 많은 상처를 남기며 또한 영웅도 배출하였다. 의병장으로써 곽재우, 우배선 장군과 승병의 중심지 동화사의 사명대사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두 외국인 장수들이 대구에 터를 잡아 살았으니 사액(賜額) 김해김씨 시조인 김충선과 명에서 원군으로 온 장수 두사충이다. 지금도 김충선장군을 배향하는 가창 우록리 녹동서원과 수성구 만촌동 두사충장군의 호를 딴 모명제가 있다.       


8. 감영, 경상도의 중심으로

  감영의 대문 관풍루는 달성공원에, 하마비는 선화당 옆으로
  그래도 감영인지라 흩어져 있던 선정비는 모아 둔 감영공원
  판관을 향하는 칼날 같은 수운(水雲)선생*의 눈빛을 뒤로 하고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것도 감영에서
 
조선시대 지방의 행정구역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각 도에 관찰사를 두었는데 이들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곳을 감영이라 한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대구는 국방상의 중요성까지 부각되어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다. 경상감영은 경상도의 행정, 사법, 군무를 통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관청으로 1601년에 대구에 설치되어 1910년까지 이곳에 자리하였다. 현재의 감영 뒤편에는 대구시내 도처에 흩어져 있던 관찰사 선정비를 모두 옮겨와 관리하고 있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遇)는 1863년 경주에서 체포되어 경상감영으로 압송, 이듬해 좌도난정율(左道亂正律)의 혐의로 관덕정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9. 읍성은 헐리고

 읍성은 헐리며 신작로 들어서고
 영남대로 옆으로는 철길이 달리 도다
 아하!
 우리 길 불편한 건 네 몸뿐이란 걸!

 1907년 일제는 친일인사 박중양을 앞세워 대구 근대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명분으로 읍성을 철거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대구의 상권 장악이 그 목적 이었으며, 읍성 철거 후 일제에 의한 경제적 침탈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지금은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망우고원에는 읍성의 남문인 영남제일문이 복원되어 있다.


10. 나라 빚 갚고 독립으로 가자

 나라 빚 갚고 독립으로 가자!
 돈으로 나라도 사고파는 시대이니
 돈 주면 가면 그만이지.
 가락지와 비녀가 녹아 하나가 되듯
 우린 네가 아니라도 하나인 것을!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에 강제로 떠넘긴 부채는 1,300만원에 이르렀는데, 이는 대한제국 1년 예산과 맞먹는 큰 액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진 빚을 갚는 것이 급선무라는 인식이 확대 되면서,1907년 대구광문사에서 서상돈, 김광제 등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발의 하였다. 비록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이 운동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었지만 전국적 항일 민중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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