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만나는 대구

  작성자   : 김주명 (daegustory@naver.com) 추천: 402, 조회: 4071, 줄수: 12, 분류: Etc.
성막과 읍성 - 의료선교박물관(2)
성막과 읍성

선교박물관 옆에는 1800년대부터 1900년대에 이르는 많은 동서양의 의료기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의료박물관이 있다. 마지막으로 교육•역사박물관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양한 민속사료와 조선시대 이후부터 1차에서 6차 교육과정까지 각 시대별 교육서적과, 교과서, 서당, 초등학교 교실 등이 전시되어 있고 2002년 월드컵대회와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남긴 기록들과 자료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 있는데 2층에 있는 대구3.1독립운동 역사관이다. 이곳에서는 대구의 3.1 독립운동의 발자취와 일제 만행을 그대로 볼 수 있으며 그때 당시의 대구의 모습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보여주고 있는데, 그 속에서 뜻밖에 대구 읍성을 만날 수 있다. 물론 대구읍성이 허물어진 시기는 1907년이고 3.1운동은 1919년이라 시대는 맞지 않지만 전체적인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 하고자 대구의 읍성도 포함했다고 한다. 그럼 여기에서 대구읍성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대구읍성은 1907년 박중양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주된 이유는 일본인들이 성안으로 상권 확보를 위해서였다고 알려져 있다. 성이 있었던 자리에는 새로운 길이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가 생겨났으며 지금도 대구의 중심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일부 단체에서는 읍성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고 있으며 읍성과 연관된 여러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대구읍성이 언제 만들어 졌는지, 그 만들게 된 경위에 대해서 살펴본다면 우리가 읍성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막연한 기대감이 다소 해소 될 것이다.

최조의 대구읍성은 1590년(선조 23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토성으로 쌓았으며 임진왜란 때 대구의 함락과 더불어 파괴되어 버렸다. 그 뒤 1736년(영조12) 당시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였던 민응수에 의해 읍성이 다시 축조되었다. 성의 축성 기록이 담겨있는 영영 축성비에 의하면, '대구 읍성은 1736년 1월 8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4월 25일에 체성(體城)을 완성하였고, 6월 6일에 여첩(적의 화살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한 방어시설)을 완성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사 기간은 6개월이었으며, 연 인원만 78,584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완공된 성은 둘레 길이가 2천 1백 24보(2,650m), 여첩이 8백 19개, 성 높이가 서남쪽 18척(5.5m) 동쪽 17척(5.1m)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예로부터 구릉과 산성을 방어하는 요충으로 중시하여 평지에는 성을 잘 쌓지 않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파격적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중요한 방어적 군사시설인 팔공산 가산산성을 살펴보면 사뭇 다르다. 가산 산성의 내성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640년(인조 18)에 완성하였으며, 외성은 1700년(숙종 26), 중성은 1741년(영조 17) 각각 완성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이 끝나고 15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방어적 군사시설 가산산성을 견고히 해둔 시점에 굳이 평지에다 그다지 방어와 수성에 원활하지 않는 대구읍성을 쌓은 것을 볼 때, 일본의 또 다른 침입에 대비해 축조했다고 하는 데는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읍성의 구조를 자세히 보면 대구읍성이 보호하고 있는 시설은 경상감영이다. 기록에도 보면 “완공된 성에는 4개의 큰문과 2개의 작은 암문을 건설했다. 4대문은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반면에, 이 두 암문은 비교적 출입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백성들이 즐겨 이용했다”고 한다. 감영은 지방을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시설이자 강력한 왕건의 상징이기도 했던 것이다. 왜란과 호란을 격은 조선왕권의 권위는 말할 것도 없으며, 당시 사회상은 어떠했는지는 역사교과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양반계층의 몰락과 상공업의 발달, 자유로운 사상 등 변화하는 사회구조를 기존 왕조 정치로써는 해법을 찾기 어려웠으나, 다시금 왕권을 강화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지방을 통치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 거대한 구조물 읍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구읍성은 일본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보다는 백성들로부터 왕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읍성의 또 다른 임무였으리라.

요즘 대구의 대표상징으로 대구읍성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필자는 왜 그토록 읍성에 대해서 연연하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관광자원으로서 필요한 것이지, 아니면 기타 여러 도시에 비해 문화적인 왜소함을 극복하려는 것이지 그 명확한 답이 없다. 모든 것에는 그 쓰임(用)이 있으며, 쓰임은 시대와 역사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대구읍성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면 필자에게는 꼭 ‘성막을 다시 짓자’는 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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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9(10:47) from 203.175.57.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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