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얼의 연극 일기

  작성자   : 허승준 (anthro2001@hotmail.com) 추천: 409, 조회: 1410, 줄수: 4, 분류: Etc.
허승준의 연극일기 12
4월 15일. 5시쯤 소극장에 도착하니 가은 씨와 사라 씨가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몸이 편찮으셔서 나오지 못하셨던 이희즙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아직 다 낫지 않으신 것 같아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건동 선생님께서는 연습하는 가은 씨에게 의식하지 말고 집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식하면 연기가 왜곡되고 겉멋으로 치우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온전하게 집중할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 표현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실생활에서도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연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 의도적으로 호의를 베풀거나 감정을 과장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상대는 자신에 대한 배려로 받아들여서 고마워하고 좋아하지만 그 이상 감동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머릿속의 생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속의 의지에 의해서 나도 모르는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상대는 감동해서 눈물 흘립니다. 나는 영문을 몰라 얼떨하지만 연인이 좋아하는 그 모습이 나도 좋아 어색한 웃음을 짓습니다. 일할 때도 그렇고 운동할 때도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가 멋있고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 정말 멋있고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선동이 형과 지혜 누나가 관객으로 오기로 했습니다. 지난주에 오기로 했었는데, 제가 오지 못하는 바람에 미루어졌었습니다. 선동이 형과 지혜 누나는 지난번에 연극을 보러왔던 친구들 모임을 주관하는 단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역할을 떠나  친구 같이 지내는 사이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까지 연극을 보러 온 친구들이 모두 저와 같이 일을 하면서 막역해진 친구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보다 더 오랜 시간 친한 친구들도  있지만, 느낌이 조금 다릅니다. 이 친구들은 넓은 세상에서 찾아낸 또 다른 나와 같은 친구들입니다. 이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살아있는 것을 느끼고 무한한 상상과 의지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나와 통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하게 만들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즐겁고 벅차며 기쁩니다. 그래서 특별한 말없이 연극을 권하고 그들의 감정을 믿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보는 ‘거울인형’이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작품을 다시 본다는 기대로 설렜습니다. 보통 때와 다른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내 그들의 연기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느린 1막과 2막에서 조금 지루했다는 관객의 반응이 나왔지만 저는 예상보다 빠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3막에서 관객들과 호흡이 이루어지고 사라 씨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집중이 잘 이루어졌다고 여겼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선생님께서는 위대한 예술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앙리 마티스의 말을 인용해 관객들이 작품을 그 자체로 이해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다만 작가로서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깊이 때문이었는지, 선동이 형은 ‘현대인이 자연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였습니다. 저도 아무리 현대 사회가 걷잡을 수 없는 자본주의로 치닫고 있다고 하여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역사가 그러했듯이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그런 급진적인 무위자연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의문도 같이 들었습니다. 위대한 예술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명료하더라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각자 다른 명료한 생각을 하면서 예술을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때요, 상상만 해도 재미있지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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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2(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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