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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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옮긴글 추천: 42, 수정: 1, 조회: 452, 줄수: 35, 분류: Etc.
'하느님이 함께 계심’에 깨어 있어라!
대강절 첫번째 주일설교 (2012년 11월 27일)
본문:  마가복음서 13:33-37
설교자:  최성철 목사

오늘부터 시작하는 대강절(Advent)은 교회력에서 새해가 시작되는 첫번째 절기입니다. 또한 교회력으로는 새해가 시작하지만 세계의 달력으로는 한 해가 끝나갑니다.

2011년 한 해에도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진과 쓰나미와 홍수로 수많은 인명들을 잃었고 이 일로 인해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 빠져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경제 불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으며 생계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해가 갈수록 생태계의 오염과 지구의 온난화로 무수한 생물종들이 멸종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국제기업들이 마치 제국의 통치자들처럼 세계경제와 정치를 비인간적으로 통제하고 착취하고 있습니다. 한국 국민들은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앞날의 국민경제에 대해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류역사에서 강자는 언제나 약자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부와 안정을 추구했습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오늘 세계의 정치적 또는 경제적 상황은 인구의 80%가 넘는 힘없는 사람들이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컴퓨터의 구굴 웹사이트 (www.google.com)에 들어가서 ‘검색’(search)이란 자리에 ‘빈곤’(poverty)이란 단어를 치면 지구촌의 가까이에서 멀리까지 얼마나 많은 모든 동료 인간들이 절망 속에서 생존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는지에 대해서 수많은 자료들이 우리들의 눈 앞에 떠오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준비하는 대강절 절기에 이 지구촌을 위한 ‘예수의 좋은 소식’이 어디에서 들려오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신약성서가 증거하는 ‘좋은 소식’은 인간 예수의 탄생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좋은 소식’은 중개인들을 통해서 또는 멀리 하늘 위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나의 내면으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관계로부터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강절의 의미는 이미 나와 우리 안에 있는 ‘좋은 소식’ 즉 ‘하느님이 저 멀리 하늘 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심’을 민감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고 이 세상 가운데에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좋은 소식’이며 이 어려운 경제불황과 불안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좋은 소식’은 죽어가는 생태계를 다시 살릴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이 좋은 소식은 강자들이 약자들을 통제하고 착취하는 것을 중단하게 합니다. 이 좋은 소식은 약자들이 강자들의 불의에 항거할 수 있는 힘이 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비전이 됩니다.  

마가는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하느님이 함께 계심에 더욱 민감하고, 귀를 기울이고, 눈을 뜨고, 마음을 열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심’은 하늘 위에서 천둥번개치는 소리가 들리고 땅 위에서 웅장한 광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평범한 일상 생활속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을 진지하게 솔직하게 순수하게 사는 가운데에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과 사심과 두려움과 편견을 내려 놓기만 하면 누구나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고, 나와 세계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심리학자 융의 정신 치유법의 대가인 토마스 무어(Thomas Moore)는 일찌기 서방세계에 선불교(禪佛敎, Zen)를 소개한 데이빗 스주키(David Suzuki)와 식탁에 둘러 앉았던 때를 기억했습니다. 그 식탁에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들이 여러 사람있었습니다.

선불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어느 학자가 수주키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주키는 아무 말없이 묵묵히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자는 답답한 나머지 ‘나같은 서양사람에게 선불교에 대해서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수주키는 그 학자의 눈을 뚜러지게 바라보면서 이례적으로 목소리에 힘을 넣어 말했습니다. “지금 드시고 계신 식사에 열중하십시오.”  

교회의 온갖 모임들인 주일예배와 수요모임과 노자모임과 수련회들은 모두 영성훈련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나 영적인 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평범한 세상 속에서 ‘하느님이 함께 계심’ 즉 하느님의 모습과 음성을 보고 들을 수 있기 위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훈련하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제사종교 또는 책의 종교 또는 믿는 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 생명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라는 말의 의미는 이러한 것입니다.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과 기도회와 성경공부와 수련회에 참석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러한 모임들에 아무리 열심히 많은 시간을 쏟아 부어도 세상 속에서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면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허송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이 우주 속에서 살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더 민감하게 느낌으로 자연과 인간과 다른 생명들과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이 신앙과 삶의 목적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유일한 목적은 무엇을 더 잘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생명들과 함께 더 잘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토마스 무어는 영성(Spirituality)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성은 세속적인 세상에서 씨가 뿌려지고,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영성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가장 작은 일들에서 느낄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참조. ‘Care of the Soul’, Thomas Moore, 1992)

틱 낫 한 스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침에 눈을 떠서 제일 먼저하는 일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는 것입니다. 새로운 24시간이 나의 앞에 있습니다. 나는 오늘 하루 동안에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온전히 살면서 다른 모든 생명들을 연민의 사랑으로 대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참고. ‘Earth Prayers’, edited by E. Roberts and E. Amidon, 1991)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이 함께 계심’(임마누엘)을 세속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대강절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모든 주변에서 언제 어디에서나 눈으로 보이지 않고 귀로 들리지 않는 하느님의 모습과 음성이 나의 가슴으로 보이고 들리는 것을 축하하는 것이 새해를 시작하는 대강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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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30(09:13) from 174.92.10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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