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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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옮긴글 추천: 45, 수정: 1, 조회: 276, 줄수: 47, 분류: Etc.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죽는다
사순절 두번째 주일설교 (2011년 3월 20일)
본문: 요한복음서 3:1-11a
최성철 목사

우리는 수요모임에서 성서로부터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고대의 성서 이야기의 현장에 있는 것을 상상하면서 등장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모습과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렇게 고대의 성서 이야기의 현장으로 가서 그 시대에 동참함으로써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가슴으로부터 듣는 것이 기도입니다.  즉 기도는 저 하늘 밖에 계신 하느님에게 말하고 주문하고 무엇인가를 받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공동체와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훈련과 관련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니고데모의 이야기도 문자적으로 읽기 보다는 우리의 상상력으로 옛날 이야기의 현장으로 가서 거기에서 가슴으로부터 성서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깊은 밤 중에 어떤 사람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서 누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어두움 속으로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사회의 지도층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비밀리에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데에는 중요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요한복음서에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 요한에게 큰 의미가 있고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해서 많은 설교가들은 지금까지 니고데모를 편협한 사람, 직역주의자, 관념적이고 교리적인 사람으로 폄하해왔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읽으면서 요한이 소개하는 니고데모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니고데모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에게 큰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깊은 밤 중에 예수의 초자연적인 기적의 능력을 보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지도자였지만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의 하느님이 누구인지, 예수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에 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두 유대인이 은밀히 만난 이야기입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와 니고데모는 유대교인이었습니다.  예수는 1세기의 갈릴리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의 기도와 신앙과 사고는 유대교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가르침은 유대교 역사와 문화의 배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의 목회와 삶은 기독교 교리와 신학과 문화가 탄생하기 훨씬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기독교는 예수가 처음부터 기독교인인 것으로 둔갑시키고 유대교가 기독교인 예수를 처형한 것으로 조작했습니다.  예수는 로마 제국의 신학에 항거하다가 제국의 형법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예수가 역사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의 최초의 니케아신조와 사도신경은 예수의 신성과 몸의 부활과 내세에 대한 천당지옥 교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예수는 역사적으로 유대인인 사실을 은폐하고, 예수의 이 땅 위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그의 정신을 폐기처분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예수가 유대교의 신앙전통과 율법을 무시하고, 조국 이스라엘을 배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유대교와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에 대단히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는 과거의 패러다임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개혁하려는 것 뿐이었지 유대교를 말살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뿌리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유대교와 이스라엘에서 분리시키면 예수의 가르침과 정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은밀히 예수를 찾아온 목적은 유대인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위 예수믿고 구원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예수도 유대인 니고데모에게 예수 믿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고 구원받아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초점은 유대인이든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모든 인간은 교리적이고 형식적이고 외형적이고 관념적인 ‘과거의 패러다임’을 내려놓고, 새로운 인간, 새로운 신앙, 새로운 삶, 새로운 하느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사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유대교의 충성스러운 지도자 니고데모는 자신의 하느님은 유대인 만을 사랑하고, 성전에만 계시고, 희생재물을 바쳐야 죄가 용서되고, 십일조를 바치고 기도를 열심히 해야만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고,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이 진노하셔서 쓰나미가 일어나고 질병에 걸리고 사업에 망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가르치기를 하느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유인이나 노예인이나 과부나 어린아이들이나 병든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모든 인류를 공평하게 아무 조건없이 사랑하십니다.  또한 하느님은 절대로 진노하시거나 징벌을 내리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이러한 ‘예수의 하느님’을 확인하려고 캄캄한 밤에  예수를 찾아 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영적 순례자였습니다.  그는 진지하고 솔직한 종교적 탐구자였습니다.  자신이 오랜 세월 지켜왔던 과거의 패러다임에 더 이상 안주하지 않고,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 나선 사람이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기존의 가치관과 기준을 내려놓고 새로운 진리와 가치관을 찾는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새로운 것을 찾았다고 떠들어대면 사회에서 매장되거나 추방됩니다.  주류와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다르면 이방인이 되고 이단으로 몰려서 버림받게 됩니다.  예수가 처형된 가장 큰 이유는 기존의 제국주의의 가치관과 성전신학을 거부하고 만인 평등의 새로운 가치관과 신앙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현대 기독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토론토지역에 수 백 개의 한국교회들이 있는데 오로지 한 교회 임마누엘 예수공동체가 다원주의의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대해서 말한다고해서 이단으로 정죄받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우리는 기존 종교가 주입식으로 강요해왔던 믿지 못할 것을 ‘믿는 것’에 지쳤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심없이 구체적으로 ‘사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위 ‘믿는다는 것’이란, 잘 믿으면 칭찬받고 보상이 따르고 잘 믿지 않으면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질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심입니다.  제국의 신학과 성전 신학과 경전의 종교와 교리적인 교회가 주장하는 믿음은 모두 사심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는 사심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이란, 지금 여기에서 솔직하게 사심없이 몸과 마음과 영으로 사는 것이 전부입니다.  오늘 하루를 온전히 사는 것은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어제를 후회하지 않고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생존의 두려움과 편견이 없습니다.  예수는 사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사심을 내려놓기만 하면 새롭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성숙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남은 생애의 이야기를 새롭게 쓰고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니고데모의 이야기의 초점은 ‘사는 것’에 대해서 더 깊은 호기심을 기울이라고 요청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는 것은 적당히 하고 믿기만 잘 믿으면 된다는 과거의 생각을 내려놓고 새롭게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과거에 살았던 방식과 형식에 메어달리지 말고, 새로운 가능성의 눈으로 새롭게 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탐구하는 사람들의 선구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과거의 패러다임을 내려놓는 용감함과 새로운 신앙과 삶을 탐구하려는 창조성과 예수에게 솔직하려는 겸손함과 자신의 마음을 새로운 진리에 개방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새로운 신앙과 새로운 삶에 대한 호기심과 질문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예수의 정신을 접함으로서 ‘인생의 새로운 여정의 길’을 찾았습니다.  예수는 다시 태어나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는 의심하고 질문하지 말고 무조건 순종하며 나를 따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새로운 진리에 대해서 눈이 있으면 보고, 귀가 있으면 들으면서 스스로 깨달으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 것인지에 대해서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는 신앙이란 옛날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보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는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신학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외형적으로 거룩한체하면서 경건한 모습을 보이고 말장난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예수는 내면의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삶을 사느냐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예수는 대단히 세속적이었습니다.  예수는 거룩함과 성스러움은 성전이나 교회의 전용물이 아니라 삶의 현장인 장터에서, 둘러 앉아 먹고 마시는 식탁에서, 생선비린내가 물씬 거리는 바닷가에서, 황무지같은 들판에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의 신앙과 삶은 교회에 와서 거룩한 모습을 하고 형식적인 말을 하고 앵무새처럼 노래부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인종과 종교와 문화를 넘어서서 사심없이 살면서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영원한 생명(영생)이고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오늘 한국기독교 교회 안에는 역사적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당장 어두운 밤 길을 용감하게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는 니고데모 후보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의 징표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양심의 갈등 속에서 번민하던 니고데모들이 예수의 하느님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용감하게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사심없는 질문과 생각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캄캄한 밤 길에 담대하게 예수를 찾아나선 니고데모입니까?  우리는 새로운 신앙과 새로운 삶을 탐구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니고데모입니까?  기독교 교회가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은 위험을 무릅쓰고 밤 길을 나서는 니고데모가 더 많이 나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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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21:15) from 174.92.10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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