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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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경재 (irsse@ymail.com) 추천: 64, 수정: 3, 조회: 452, 줄수: 49, 분류: Etc.
땅에 떨어진 신뢰와 기대를 다시찾는 개신교가 되려면
세상 사람들은 고희를 넘기면, 사회 각 분야 에서 정신없이 일하면서 달려왔던 초중고 동창들이 서로 모이기를 원한다. 부담없이 대화를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듣고, 무엇보다 인생을 관조할만한 나이가 되었으니, 진한 농담도 즐기면서 대자연으로 돌아갈 죽음의 준비도 조금씩 하려는 것이다. 오랜만에 중고등 동창회에서 목사의 길로 갑자기 빠져나간 나를 옛 동창이라고 생각해줘서 굳이 꼭 한 번 참석을 강권한다.

그들 중에는 믿는 사람도 있고 종교 없는 사람도 있다. 종교도 각양각색이어서 ‘정치와 종교’ 이야기가 깊어지면 식탁대화가 깨어지기 일쑤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안다. 그래서, 서로 조심하고 적당한 선에서 말머리를 다른 화제에로 돌려버리는 지혜를 발휘한다. 모처럼 목사 동창이 나왔으니, 평소 쌓인 개신교에 대한 불만, 원망, 비판, 바람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그들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그래도 꽤 지도급인사들로서 활동하던 사람들인지라, 개신교에 대한 그들의 허심탄회한 소감은 곧 오늘 우리사회가 개신교를 어떻게 보는가 실상의 압축이라 여겨져 맘이 아팠다.

동창 중 목사 친구가 속한 개신교가 잘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소리일 것이다, 동창들의 개신교 비판엔 일부 몰이해도 있고 그들 자신과 가족이 받았던 피해경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충정어린 비판엔 진심이 담겼고, 개신교가 되살아나려면 환골탈퇴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의견이 합치하고 있었다. 동창들의 비판요지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첫째, 개신교 목사들이 너무 공부를 아니하는 것 같아서,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설교를 더는 못 듣겠더라는 것이다. 공부 좀 더하고 수행도 좀 했으면 좋겠다는 충고였다. 둘째, 개신교 지도자들은 너무나 독불장군, 안하무인, 자존망대 병에 걸린 사람 같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통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다른 집단의 말을 경청할 줄 모르는 사람들 같다는 것이다. 셋째, 자기들이 받는 개신교목사들의 인상은 너무 명예욕이 강하고 권력욕이 강해서 성직자가 갖춰야 할 청빈한 기품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성직자라면서 무슨 감투싸움이 그리도 치열한지 세속적 자기들이 볼 때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는 것이다.

논어 첫페이지 첫 세 구절이 갑자기 마음에 떠올라

동창모임을 파하고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맘은 착잡하면서도, 동창들의 진단이 핵심을 집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환자의 병원인 진단을 바로하면 치유는 절반 이상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상하게 한국 개신교가 되살아날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왜 동양삼국의 지성인들의 맘을 2,500년간 닦아왔던 유교의 제1경전 <논어>의 첫 페이지 첫 세 구절 내용이 그렇게 편집구성 되어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목사들에게는 더 적절하고 심오한 성경구절이 많겠지만, 성경구절은 늘 먹던 밥과 같고 발에 익숙해진 가죽 신발 같아서 자극이 덜할 수 있다. 유교에서 ‘군자’(君子)란 성숙한 사람,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 남의 지도자나 선생이나 관리가 될 수 있는 기본자격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목사’(牧師)는 신도들을 목양하듯 영적으로 돌보고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 직이니, 군자로서 자격을 갖추어야 할 것은 당연하다.

항상 새롭게 배우고 익히는 일

<논어>라는 중요한 유교경전의 첫마디는 ‘군자’의 첫째조건으로서 ‘학습’(學習)을 들고 있다. “배우고 수시로 익히면 어찌 즐겁지 않으랴!”(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움과 익힘’을 강조한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특히 종교학에서는 “하나의 종교만 알면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 된다”는 경구도 있다. 신학교육 과정과 신학교 졸업 후 목사의 길을 걷다 보면, 특히 개신교 전통에서 <성경>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된다. 아닌게 아니라, 성경을 백독만 하면 우주만물 이치와 세상만사를 훤히 깨닫게 된다. 그 안에 길이 있고, 생수가 있고, 진리가 있고, 처세술도 다 들어 있다.

그러나, 목사라고 칭하는 특별한 전문직을 가진 지도자는 <성경>만 알아가지고서는 안된다. ‘말씀’을 받고 들어야하는 세상 사람들은 중세나 근세의 몽매한 대중이 아니다.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새로운 지식과 정보로서 준비되고 훈련된 현대시민들이다. 물론 설교에서나 말씀증언에서 세상학문을 아는 척 늘어놓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새로운 동서고금의 학문을 끊임없이 배우고, 또 이미 배운 것을 더 깊게 익히는 목사와 그렇지 않는 목사와를 비교할 때, 그들 설교에서 자연히 묻어나오는 말씀의 향기와 깊이와 높이는 듣는 자에게 엄청난 차이로서 들리게 된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요즘 한국 종교사회에서 충돌이 잦은 일부 기독교 목사와 불교와의 사례를 볼 때, 과연 얼마나 기독교 지도자들이 불교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불교에 대한 편견과 자기 나름대로 선입관이 대부분이라면, 그들의 지도를 받은 평신도들의 잘못된 불교지식이 엄청난 화근을 불러오게 된다. 지난해 서울 한복판 봉은사에서 기독청년들의 땅 밟기 ‘에피소드’가 그 단적인 예이다. 나는 여름방학마다 개최되는 연세대학교 하기목회자 연수교육프로그램 속에 제대로 된 ‘불교개론’을 지속적으로 넣기를 기대한다. 아니면,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7개 신학대학교 공동주관으로 ‘불교강좌’와 ‘현대과학’ 강좌를 연동교회나 영락교회 건물을 빌려 계절마다 개설하길 염원한다.

기독교내 보수와 진보간의 대화부터 살려내자

<논어> 첫 페이지 둘째 문장은 동지나 벗들의 교류방문과 교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장이다.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않으랴!”(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벗이란 굳이 동문수학의 동창생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릴 것도 없다. 동일한 관심사와 유사한 직종에 종사하는 인간들끼리 관계에서 ‘소통과 사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삶이란 만남으로서 구성되고 만남에서는 대화와 논쟁과 협력과 상호보완이 이뤄진다.

나의 세상 중학교 동창들이 목사들에게서 받는다고 말한 인상이 충격적이었다. 독불장군, 안하무인, 자존망대한 사람들로 세상 사람들에겐 각인되어 있었다. 나를 포함한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과연 그럴까 하고 돌이켜 보았다. 우선 신학계에서만 보더라도 보수신학자들과 진보신학자들의 상호방문교류가 전혀 없다. 만남이 없으니 대화가 없고, 각자 자기 갈 길을 가면서 ‘독백’을 반복한다. ‘독백’을 하면서 자기의 갈길만 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하느님 안에서 형제자매라고 일컫는 동역자를 비난하고 헐뜯고 쉽게 단죄한다.

최근 유니온신학교 교수 폴 니타가 방한한 대담자리에서, 어느 불교계 학승이 진심으로 충고하는 것을 들었다.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논하기 전에 “기독교안에서 보수와 진보간의 대화를 먼저 힘써주시오”.

개신교가 환골탈퇴하여 잃어버린 신뢰와 민족의 기대를 회복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개신교 안에서 소통과 나눔이다. 모두 똑같아지라는 말은 아니다. 차이와 특징과 다양한 신앙적 신념을 존중하자. 그러나,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개신교 목사들은 어느 정도 누구나 독선과 독단에 빠진 병자들이 되어있다. 모두가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지켜드리는 충성스런 근위병’이라고 자처한다. 하느님도 그들의 주장만큼 그렇다고 인정 하실까? 하느님이 충성 근위 부대 없이는 하느님노릇 못하실 만큼 형편없는 분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착각일 듯 싶다. 자기착각이야 자유일는지 모르나, 좀스런 못난 근위병들 때문에 망신당하고 상처받는 임금님의 존귀함과 복음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회복된단 말인가?

자존망대 정신병에서 깨어나야 한다

<논어> 첫 페이지에 나오는 세 번째 문장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거나 안달하지 말고, 초연 초탈 자족하는 성숙한 군자 되기를 강조한다. “人不知而不不&#24909; 亦君子乎!”.

목사들은 모두 “나는 하느님의 종이다. 나는 하느님의 택함과 소명을 받고 성직자가 되었다”하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다. 그러한 맘가짐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자부심과 긍지는 자기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목사직에 부름 받은 것에 대한 겸허한 맘가짐 안에서만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대부분은 ‘위대하고 귀중한 나 하느님의 종’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노여움과 안달과 원망이 무의식 속에 가득차 있다. 그것이 모든 기독교 교회분쟁 추태의 화근이다.

개별 교단조직이나 교회연합운동 안에서 목사들의 감투싸움은 대부분 그래서 발생한다. 아닌 게 아니라, 내 자신을 솔직하게 반성해보아도 목사에게 가장 끈질기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은 ‘명예욕’이다. 이것을 초연하게 극복하는 경지에 다다르기 전에는 한국기독교의 건강회복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MB정권이 최근에 소말리아 해상에서 한국 해병대와 해군의 승전보를 국민에게 알리고 홍보하는 데 있어서, ‘도가 지나쳐서’ 망신살이 뻗치게 되었고, 자충수를 두게 되었다. MB정권의 공로를 국민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안달과 청와대나 일부 가신집단들의 ‘공로 명예욕’이 저지르고 만 과잉홍보와 충성경쟁의 추태다.

공자는 자신의 인생경험을 회상하면서 제자들에게 말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겉으로나 속으로나 화내지 말고 노여워 말라. 그래야 가히 군자라 할 것이다”. 하느님이 알아주시면 그만이 아닌가?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멸시천대 했는데, 내가 도대체 별다른 무슨 존재가 된다고 화를 낸단 말인가?

입춘이 다가오는데, 기독교는 새로워지는 봄 기운을 과연 영영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삭개오작은교회 원로목사

<기사제휴/베리타스 1월 29일 http://www.verita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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