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얼의 연극 일기

  작성자   : 허승준 (anthro2001@hotmail.com) 추천: 428, 조회: 1548, 줄수: 4, 분류: Etc.
허승준의 연극일기 3
7시 반이 넘어 다시 무대로 내려갔습니다. 오늘은 관객이 없어 이렇게 마무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건동 선생님께서 갑자기 저만 무대 위해 서보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신다고 해도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연기를 해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집에서 혼자 있거나 친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저도 마치 이상한 사람처럼 말을 하거나 표정을 지을 때가 있습니다. 친구들은 이런 저를 아주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지만요. 그렇지만 이렇게 무대 위에 서서 조명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말 그대로 앞이 캄캄했습니다. 다행히 이건동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모노로그 형식으로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연기를 해본 적은 없지만 학교 다닐 때 친구들 앞에서 말을 해본 경험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물론 말이 재미가 없고 길게 늘어지는 특성이 있어서 주변에서 말려줘야 하지만, 그때처럼 말한다고 생각하고 제 소개를 시작했습니다.
미리 생각을 정리하지 못해 무엇부터 말해야할까 고민하다가 무대에 대한 일종의 제 동경부터 말했습니다. 흔히 가수나 배우들은 무대에서 내려와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많은 시간 힘든 연습을 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예술적 재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결핍(缺乏)에 대한 동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감각을 지닌 사람들을 보면 참 멋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부럽기도 하고요.
다음으로 저에게 가장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일과 가족, 사랑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저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아직 제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들이 저를 대신할 만큼 아주 소중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대학원에 진학하여 인류학을 공부하려는 생각을 갖게 됐는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여기에 어떠한 자세를 갖고 싶은지 말입니다. 그리고 저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두 분의 모습과 성향을 골고루 갖게 해주신 부모님과, 나와 같이 부모님에서 나왔지만 전혀 다른 동생에 대해서 소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운명을 믿는 저에게 다가와줄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에 대한 기대를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것이며 그 사람도 나를 온전하게 받아줄 것이라는, 조금은 부끄러운 고백을 진심으로 말하였습니다.
제 소개를 다 하고 나자 한얼 가족들이 어떻게 들었는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내 생각에 도취되고, 또 정신이 없다보니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그래도 이건동 선생님께서 이것이 저의 첫 연기이고 이 순간만큼은 배우라고 말씀해주셔서 매우 기쁘고 신났습니다. 그리고 저 같은 학생들의 수업을 하면서 쓴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배우수업’이라는 책을 소개시켜주셨습니다. 저는 ‘배우훈련’이라고 다시 번역된 책을 읽으면서 연극일기를 어떻게 써야할지 감을 잡을 수 있었고 앞으로 책의 제목처럼 배우훈련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한얼의 연극을 접하게 됐는지부터 시작하여 3월 18일 토요일 한얼에 다시 전까지의 일기를 세 번에 걸쳐 한꺼번에 써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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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8(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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